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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도 사진

장충단공원 [奬忠壇公園]

by 류병구 2011. 12.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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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2월 01일 장충단공원 [奬忠壇公園]
남산 동쪽 종남산 기슭 아래 조성된 공원으로, 민족의 아픔을 함께 해온 역사적인 공간이다.
현재는 남산공원의 일부에 속하며, 광장·놀이터·분수대 등의 공원시설과 석호정(石虎亭)·장충단비석·이준열사동상·사명대사동상 등이 있다.
예로부터 경치가 좋기로 유명했던 이 계곡에는 조선 영조 중엽 이래 도성 남쪽을 수비하던 어영청의 분소인 남소영(南小營)이 있었고, 근처에는 남소문(南小門)이 있었다.
1895년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 민씨가 살해된 후 5년 뒤인 1900년 9월 고종은 이곳에 사전(祠殿) 1동과 부속건물 2채를 건립하고 장충단을 꾸며, 을미사변으로 순사(殉死)한 궁내부대신 이경직과 연대장 홍계훈을 비롯한 호위 장졸들의 영혼을 위하여 매년 봄·가을에 제사를 드렸다.
그러나 1910년 8월 일제에 의해 장충단은 폐사되고, 1920년대 후반부터는 민족정신을 말살하려는 그들의 의도에 따라 장충단공원이라 하여, 벚꽃 수천 그루를 심고 놀이터·연못·산책로·광장·교량 등의 시설을 설치하는 한편, 상하이 사변 때 전사한 일본군의 동상을 비롯해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보제사(菩提寺)인 박문사 등을 건립했다.
박문사의 건물은 경복궁의 예원전 및 부속건물을 이축한 것이고 입구의 문은 옛 경희궁의 흥화문을 옮겨 세운 것이었다.
8·15해방 직후 이것들은 즉시 철거되었고, 여러 가지 공원 시설물들이 들어서게 되었다.
6·25전쟁으로 장충단 사전과 부속건물은 완전히 소실되고, 장충단비(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호)가 남아 있을 뿐이다.
현재 그 자리에는 신라 호텔의 일부와 한때 국빈전용의 숙소였던 영빈관이 있다.
비의 전면에 새겨진 '奬忠壇'이라는 글자는 순종이 황태자일 때 쓴 글씨이고, 뒷면에는 민영환이 쓴 143자의 문장이 새겨져 있다.
1959년 청계천 복개공사로 이전한 수표교가 근 15년간 공원의 초입에 있었으나, 지금은 세종대왕기념관에 보존되어 있다.
장충단공원 내에는 1960년대 이후 자유 센터, 서울 타워 호텔, 중앙공무원교육원(1993년 현재 경기 과천시 소재), 재향군인회, 신라 호텔, 장충체육관, 국립극장, 국립국악원, 국립국악고등학교 등을 비롯해 어린이야구장·테니스장·수영장 등의 각종 시설물이 건립되어, 처음 42만㎡ 넓이의 공원이 계속 축소되고 주변 환경이 훼손되었다.
장충단공원을 독립된 근린공원으로 존속시킬 경우 과다한 시설물의 건립을 막을 방법이 없고, 남산공원과 함께 보존하는 것이 보다 합리적이라고 판단한 정부는 공원 전역을 자연공원인 남산공원의 일부로 흡수하기에 이르렀다.
신라 호텔, 장충체육관 등의 고급 문화·위락 시설이 있는 장충단공원은 시내 중심부에 위치할 뿐만 아니라 지하철 3호선 동대입구역에서 바로 공원으로 진입할 수 있다.
최근 서울시는 1996년까지 6개년계획으로, 급격한 도시화에 의해 훼손되어가는 남산을 회복시켜 보호하고자 '남산 제 모습 찾기' 사업을 실시하고 있다.
이에 따라 장충단공원 부지 3만 3,060㎡에 남산계곡에서 끌어 들인 물로 소폭포와 돌다리 등을 만들어 하천경관을 조성하고, 경로당 및 노인위락시설이 마련된 노인모임터와 어린이놀이터를 조성할 예정이다.
국립국악고등학교 자리 1만 3,224㎡는 민속공연장으로 꾸미고, 서울공연예술회관을 건립, 각종 공연활동의 연습장 및 연구장소로 활용할 예정이다.
또한 장충단공원을 비롯해 동서남북 각 지역에서 남산으로 들어가는 진입로를 너비 12~20m로 확장해 산 속 산책로와 연결시켜 시민들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도록 대폭 정비해나가고 있다.
남산 전체를 덮고 있는 아까시나무·은사시나무 등의 볼품 없는 외래 수종을 점차로 없애고 남산 고유수종인 소나무와 신갈나무로 바꾸어 나가며, 일제강점기에 심하게 훼손된 주변의 역사유적을 복원·재현해 나가고 있다.

 

 

 

 

 

 

 

장충단공원옆에 남산으로 올라가는 계단이다.

천천히 올라가도 약30분정도면 남산타워있는 곳까지 갈수있다.